비가 많이 온다. 맥주가 엄청 마시고 싶어서 맥주를 마시기로 했다.
나는 고졸에 부채 1600만원 가량이 있고, 월세에 거주하며, 집 근처 치킨집에서 일 12시간 근무, 주1회 휴무에 월급여 200을 받는 저임금 노동자이다. 특별한 지식과 기술 없이 약간의 일머리만 익히면 할 수 있는 비교적 단순한(말이 그렇지, 이 마져도 정말 어려운 일이다. 세상에 쉬운 일 하나도 없더라.) 시간을 팔아 돈을 받는 1차원 적인 노동자이다. 이상과 신념을 접어둔 채로 그져 생존을 위해 일을 하는 사람이다.
신세한탄이 아니라 뭔가를 시작 하기 위해서는 현 상황을 정확히 파악해야 하기 때문에 나 자신에 대해서 세속적인 기준으로 기술해 본 것이다.
요 며칠 사이, 뭐 전 직장에서 퇴사를 하면서 부터였긴 하였지만, 특히 요 며칠 전부터 행복감을 자주 느낀다.
나, 그래도 많은 것을 가졌구나. 많은 것들을 누리고 있구나.
사지가 멀쩡히 움직여 원하는 곳에 걸어갈 수 있고, 빗소리를 들을 수 있고, 타인과 이야기를 나눌 수 있으며 햇볕이 내리 쬐는 것을 볼 수 있고, 이케아 상품들을 눈으로 구경할 수 있다.
유럽여행 갈 돈은 없지만, hotel costes를 비롯한 여러 lounge 음악을 들을 수 있고 보사노바도 마음껏 들을 수 있다. 빚쟁이긴 하지만 일주일에 한번 정도는 기분을 낼겸, 외식도 할 수 있다. 작년 회사에서 급여 지급이 늦어져 L사 카드대금 14일 연체 이후로 나는 단 한번도 내 이름으로 청구되는 돈을 연체 해본 적이 없다. 충분히 관리하며 경제 활동을 하고 있다.
지난 휴일에는 홍대 마카롱 양대 산맥이라는 '마카롱'과 '슈아브'의 마카롱도 사와 누나와 실컷 나눠먹기도 했다. 지금 당장 내 집의 인테리어를 바꿀 수는 없지만 연필과 종이가 있기에 내가 원하는 공간의 도면을 그려낼 수 있다. 나는 상상할 수 있고 준비를 시작할 수가 있다.
퇴근 후, 따뜻한 물로 샤워를 할 수 있고, 클렌징 크림과 폼클렌징으로 이중세안을 할수도, 향긋한 샴푸로 머리도 얼마든지 감을 수 있다. 라벤더 향 섬유유연제로 세탁한 수건으로 몸을 닦고 스킨과 로션을 얼굴에 바를 수도 있다.
10여개 되는 H&M 검정색 속옷을 꺼내 입을 수 있으며 선풍기 바람도 쐴 수 있다. 내 창밖으로는 가로등이 내 방의 조명 역할을 해준다.
설탕같은 이불은 달기도 엄청 달다. 너무너무 달콤하다. 하루종일 몸에 감고 있어도 질리지 않을 것 같다. 아침에 일어나면 스타벅스에서 사온 원두를 직접 그라인딩하고 뉴브리카 모카포트로 에스프레소를 내릴 수 있다. 각얼음과 바닐라 시럽을 넣고 훌륭한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만들어 내 자신에게 올릴 수 있다.
현미 잡곡밥에 김치로 간단히 식사를 하고 담배 한개피를 태우고 나름 사치스런 여유를 부리며 출근 준비를 할 수도 있다.
나는 많은 것을 가졌다.
나는 꿈을 꿀 수 있다. 누구도 막을 수 없고 조소할 수 없다.
일도 약간은 능숙해졌고, 잔재미도 느낄 수 있다.
나는 1년간 '나 죽었다' 생각하고 일만 할 것이고 부채를 전액 상환 할 것이다.
그리고 새 출발을 깔끔하게 할 것이다.
음..설사 어떤 변수가 생긴다 하더라도 나는 무조건 부채를 전액 상환 할 것이다.
이유가 필요없다.
새 인생을 살것이다.
나는 입시를 준비 할 것이고, 대학의 디자인 전공학과에 입학 할 것이고, 디자이너가 될 것이다. 공간을 창조해내고 생활의 편리함과 아름다움을 사람들에게 나눠줄 수 있는 디자이너가 될 것이다. 인간을 존중하고 이웃을 사랑하고 나보다 어려운 이에게 따뜻한 마음을 나눌 수 있는 디자이너가 될 것이고, 인간이 될 것이다.
나는 꿈을 놓치지 않을 것이다. 내가 어떤 비루한 꼴로 절망의 진흙밭에서 구르게 되더라도
내 삶을 사랑할 것이고 집요하게도 내 꿈의 머리카락을 부여잡고 놓아주지 않을 것이다.
나는 행복하다. 그렇게 느끼고 있다.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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